“실재하지 않는 영상으로도 사람을 옥죄는 협박이 가능하다. 그런데 ‘촬영물 이용 협박죄’는, 정작 그 영상이 ‘존재하고, 피해자를 담고’ 있어야만 성립한다.”
허공에 떠도는 영상, 법은 어디까지 좇아갈 수 있을까
지난 6월 12일 대법원은 ‘존재하지 않는 성관계 촬영물을 미끼로 돈을 갈취하려 한 사건’에서 1·2심의 무죄를 그대로 확정했다. 판결문은 단호했다. “‘촬영물 등을 이용하여’란 실제로 만들어진 촬영물을 방편·수단으로 삼아 협박하는 행위를 뜻하므로, 피해자를 담지 않은 영상으로는 제14조의3 제1항 위반이 성립할 수 없다.”
이 사건의 피고인은 피해자와의 관계를 암시하는 영상을 갖고 있다고 거짓말하며 ‘돈을 주지 않으면 유포하겠다’고 위협했다. 협박이 현실적 공포를 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의 영상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대법원은 “촬영물 자체가 실재하지 않는 때”뿐 아니라 “촬영물이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 제작된 때”도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결국 성폭력특례법상의 촬영물 이용 협박죄가 아닌, 일반 형법상 협박·강요죄 적용 가능성만 남게 된 셈이다.
왜 특별법보다 형법으로 돌아가야 했나
성폭력특례법 제14조의3이 도입된 2020년 이후 입법자는 ‘디지털 성범죄의 무형성’을 포획하기 위해 법정형을 대폭 올렸다. 촬영물 이용 협박죄는 1년 이상(강요는 3년 이상)으로, 형법 협박죄(최대 3년 이하)보다 훨씬 무겁다. 하지만 입법 과정에서 ‘영상이 존재하지 않는 협박’이 별도로 규율되지 못했고, 조문에도 “촬영물 등을 이용하여”라는 요건만 남았다.
그 허점을 2024년 11월 첫 대법원 판례가 파고들었다. “존재하지 않는 성관계 영상으로 협박했어도 성폭력특례법은 적용 불가”라는 당시 판시는 이번 2025년 판결에서 재확인되었다.
법 철학적으로도 이해할 만하다. 특별법이 ‘영상 자체’를 범행 수단으로 삼아 가중처벌하려는 취지라면, 매개물이 없는 협박은 이미 형법에서도 처벌 가능하니 이중적 규제가 불필요하다는 논리다. 문제는 현실이다. 피해자는 ‘없는 영상’ 앞에서도 존재하는 영상만큼의 공포를 겪는다. 형법상 협박·강요죄 법정형(3년 이하·5년 이하)은 특례법(1년 이상·3년 이상)보다 낮아, 피고인의 처벌 수위가 크게 달라진다.
2025년 6월 4일 시행령 개정으로 달라질까?
마침 이번 달 4일부터 개정 성폭력특례법이 시행됐다. 그러나 제14조의3 본문 구조는 바뀌지 않았다. 촬영물이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전제, “촬영물 등을 이용하여”라는 구성 요건도 그대로다. 입법자는 영상이 ‘존재하지 않는’ 협박을 별도로 정의하지 않았다.
법무부·국회가 추진 중인 후속 개정안 초안에서는 ‘촬영물을 가장하거나 허구·합성 콘텐츠(딥페이크 포함)를 협박 수단으로 사용할 경우’까지 특례법 적용 범위를 넓히는 방안이 논의된다. 하지만 아직 의견수렴 단계다. 입법 공백은 적어도 올가을 정기국회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변호사의 실무적 단상
- 형사 방어 – 피고인이 실제 영상을 보여주지 않은 채 “있다”고만 말했을 때, ‘촬영물 존재’를 검사가 실증하기 어렵다. 판례 흐름에 비춰 무죄 가능성이 높으므로, 초반 수사 단계에서 ‘영상 실재성’ 입증 책임이 검사에게 있음을 적극 환기시키는 전략이 효과적이다.
- 피해자 대리 – 법정형 격차를 메우기 위해 협박과 더불어 편취·갈취·명예훼손 등 복합적 죄명을 검토해야 한다. 특히 SNS 공개 협박이라면 정보통신망 명예훼손(‘허위사실’)이 추가 적용될 수 있다.
- 정책 제언 – ‘실재‧비실재’를 기준으로 죄질을 구분하는 현 체계는 디지털 현실과 괴리가 크다. “디지털 게시·유포 가능성”을 피해자 중심으로 평가해 가중처벌 여부를 판단하도록 법문을 전환해야 한다.
맺음말
실체 없는 영상에도 공포는 무게를 가진다. 가상의 이미지를 빌미로 한 협박이 날로 교묘해지는 디지털 시대, “존재 여부”만으로 죄를 가늠하는 전통적 법리와 “느껴지는 피해” 사이의 온도 차가 선명해졌다. 입법자가 그 간극을 메우기 전까지, 우리는 형법이라는 ‘낡은’ 도구와 창의적 법리로 피해자를 보호해야 한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그 숙제를 우리 모두에게 다시 던졌다.
형사전문변호사 이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