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안 납니다”는 방패가 아니다—그러나 전략은 있다
수사실에서 가장 자주 듣는 첫마디가 “정말 기억이 안 납니다”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기억 상실은 범죄 성립을 자동으로 부정하지 않습니다. 형법은 ‘의도적 과음’ 자체를 면책 사유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성범죄에서는 가해자의 주관적 기억보다 당시 객관적 정황(상대방의 동의 여부·항거 가능성·행위의 수위)이 중심이 됩니다.
그렇다면 블랙아웃 상태의 피고소인은 무엇을, 어떻게 밝혀야 할까요? 핵심은 “모른다”에서 멈추지 않고 “그럼에도 사실을 복원하는 절차”로 즉시 들어가는 것입니다.
1) 첫 48시간: 접촉 중단 · 기록 보존 · 건강검진
- 연락·접근 즉시 중단: 사과/해명 메시지는 뒤늦은 ‘인지·승인’의 증거로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잠정조치가 내려지면 위반 자체가 별도 범죄가 됩니다.
- 원본 증거 보존: 휴대폰 백업, 위치기록, 호출·결제·출입로그, 사진·영상(편집/삭제 금지), 착용했던 옷(섬유·DNA)까지 그대로 보관하세요.
- 의료기록 확보: 병원에서 혈액검사·간기능·잔류 약물 스크리닝을 받아 두면, ‘과음의 정도’나 약물 혼입(술에 타진 약) 가능성 판단에 도움이 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검출력은 급격히 떨어집니다.)
2) “블랙아웃의 법리”: 기억 상실 ≠ 행위 불능
음주성 기억장애(블랙아웃)는 행위는 가능하나 저장이 안 되는 상태가 흔합니다. 즉, ‘기억 없음’이 곧바로 고의·과실 부재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변호인의 과제는 “기억 공백을 사실 복원으로 메우는 일”입니다.
반면 비자발적 음주/약물(성분 혼입) 정황이 소명되면, 가벼운 과실·과격한 행위 능력 부재 등 양형·죄책 판단에 중요한 참작 사유가 될 수 있습니다.
3) 사실 복원 로드맵: 타임라인과 상대 상태
- 타임라인 구축: 결제·택시·대중교통·CCTV·통화기록·사진 메타데이터로 분 단위 동선을 만듭니다. 기억보다 로그가 우선입니다.
- 상대방 상태 확인: 상대가 심신상실·항거불능(수면·실신·만취·공포·구속 등) 상태였는지 여부는 사건의 중대 변수입니다. 동석자·업장 직원 진술과 영상이 핵심입니다.
- 동의의 형성·철회 시점: 메신저·음성·현장 CCTV로 사전 설명·거절 시 즉시 중단 여부를 구조적으로 재구성합니다. ‘취중 동의’가 있었더라도 형성·표현 능력이 무너져 있었다면 법적 동의로 보기 어렵습니다.
4) 초동 진술 전략: 모르는 건 모른다고, 아는 건 자료로
- “기억이 안 난다”는 한정적 진술로만 표기하세요. 추측·가정은 나중에 모순 진술이 됩니다.
- 사실관계는 자료로만 진술하세요. “몇 시에 어디 있었다” → 영수증·GPS “누구를 만났다” → 통화·메신저 로그.
- 피의자신문 전에 변호인과 적용 가능 죄명과 각 구성요건을 점검해, 조사 포인트를 좁혀두는 것이 안전합니다.
5) 약물 혼입 의심 시 별도 패스
- 동석자 채혈·CCTV 보전요청을 신속히 진행하고, 업장 보관 영상의 보존 기간을 확인해야 합니다(대개 7~30일).
- 영수증·카드내역으로 음료 제조·서빙 동선을 추적하고, 컵·빨대 등 물적 증거 확보 가능성을 검토합니다.
6) 합의와 사과—언제, 어떻게
합의는 사건 해결의 하나의 수단일 뿐입니다. 문구에 “사실 인정”을 암시하는 표현이 들어가면 형사 결과에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접근금지·재발방지·치료이수 같은 행동 약속이 포함될 때 실효성이 높습니다. 합의 전에는 반드시 초기 수사기록을 검토하세요.
한 줄 정리
블랙아웃 사건의 승부는 기억이 아니라 기록에서 납니다. 접촉을 끊고, 원본을 지키고, 타임라인을 세우고, 상대의 상태를 객관화하십시오. “모른다”로 멈추지 않고 “그래서 이렇게 확인했다”까지 나아갈 때, 수사는 비로소 사실의 언어로 움직입니다.